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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로자의 날(May Day)-1

작성자: 대한노인회 부안군지회    작성일: 2025-05-12   조회수: 9   

근로자의 날(May Day)-1

 

매년 51일은 세계 노동자의 날메이데이’(노동자의 날-근로자의날)라고도 한다.

우리들의 생활의 중심에는 의식주(衣食住)가 있다. 의식주를 여유 있게 계속하려면 일정한 소득이 있어야 한다.

그 소득을 계속 확보하는 주요 수단은 노동력이고 일자리다. 1780년대 유럽의 산업혁명 이후 생산수단이 공장식으로 변하였다. 해가 뜨면 출근하여, 해가 지면 퇴근하는 노동자들은 12시간 이상 일하는 관계로, 노동자의 건강은 악화되고 자기시간도 없게 되었다.

이에 따라 노동자들은 하루의 노동시간을 8시간을 주장하였으나 자본가인 공장주인들은 이에 응하지 아니하고 노동자를 계속 탄압하였다.

이에 따라 전 세계의 노동자들은 뭉치고 단합하여 이에 대응하였다. 이는 최근 1886년 미국노동 총동맹은 하루에 8시간으로 노동시간을 주장하며 51일 총파업을 결의하였다.

미국 전 지역에서 34만 명의 노동자가 항의하며, 19만명이 파업에 참가하였다. 53맥코믹 농기계 공장에서 농성 중인 노동자들은 경찰과 충돌하여 6명이 사망하는 희생자도 발생하였다.

또 다음 날 헤이마켓 광장에서 항의 집회 때 폭탄으로 사상자들이 발생하였다. 이를 이유로 노동계의 지도자들 8명을 사형하였다.

189051일부터 이들을 기억하고, 그들의 정신을 이어받기 위해 제2 인터내셔널(국제노동자협회)에서는 모든 나라 모든 도시에서 함께 18시간 노동의 확립을 공개적으로 요구하는 대규모 국제 시위를 조직한다고 선언하였다.

이때부터 전 세계에서 시메이데이(May day)가 시작된 것이다.

 

근로자의 날(May Day)-2

 

1893년 조선 말기에 백성들은 근대화에 눈을 뜨기 시작하는 갑오개혁 운동이 시작되는 때였다.

우리나라에서는 1923년 일제 강점기에 조선노동 연맹과 그 산하단체가 메이데이 기념행사를 준비하였다.

서울의 각 노동단체는 51일 각 공장 노동자들이 1일 동맹파업을 하기로 하였다.

그래서 장충단공원에 모여서 노동시간 단축’, ‘임금 인상’, ‘실업 방지등을 주장하며 시위행진을 하기로 하였다.

 

그러나 조선총독부는 장충단공원에 모여드는 노동자들을 잡아들여 기념행사를 막아. 서울에서는 2,000여 명의 노동자가 서울 중앙기독교 청년회관에 모여 기념 강연을 듣는 행사로 변경하였다.

해방 뒤 처음으로 맞는 메이데이는 194651일이었다. 서울에서는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가 중심이 되어, 전국 곳곳에서 메이데이 기념식이 치러지고, 서울운동장에서 20만 명의 노동자가 참가하여 메이데이 기념식을 치렀다.

노동자들은 쌀과 직업을 달라’, ‘공장 폐쇄하라, 해고 절대 반대한다’, ‘실업자에게 일자리를 달라’, ‘8시간 노동제를 즉시 실천하라’, ‘생활을 보장할 수 있는 최저 임금제를 실시하라는 구호를 외치면서 시가행진을 벌였다.

그런데 이승만 대통령은 1957522메이데이는 공산 괴뢰도당들이 선전의 도구로 이용하고 있다며, 반공하는 우리 대한제국의 노동자들이 경축할 수 있는 참된 명절이 제정되도록 하라고 지시하였다.

이에 따라 대한노총은 195811차 전국 대의원 대회에서 대한독립 촉성노동총연맹의 결성일인 310일을 노동절로 정하였다.

박정희 대통령은 노동절이라고 부르는 것도 마땅치 않았다고 하며, 1963417근로자의 날 제정에 관한 법률을 만들어 근로자의 날로 변경하였다.

 

 

근로자의 날(May Day)-3

 

근로자라는 용어는 1940년대 일제가 자주 썼던 말이다. 일제는 이 말을 천황과 일제를 위해 봉사하며 열심히 일 한다는 의미가 숨어있다.

그러나 1989년부터 우리나라에서도 메이데이로 다시 쓰게 되었다. 노동자들은 1989년 메이데이 100회를 앞두고 노동절은 세계 노동자의 연대와 해방의 날이라고 선언하고 전국에서 동맹파업과 거리 시위를 벌였다.

그 결과 199351일부터는 자유스럽게 노동자의 날 집회를 열게 되었다. 그리고 1994년 정부는 310일이 아닌 51일을 노동자의 날로 개정하였다.

이로써 우리나라의 노동자들도 마침내 메이데이의 합법성을 쟁취하였다.

메이데이(May Day)는 근로자의 날이란 의미도 있지만,

비행기가 비행 중에 긴급한 상황이 발생 할 경우에도 사용되고 있다.

비행 도중에 비행기에 이상이 있어 조종사가 긴급하게 구조 요청 시

무전기에 메이데이 메이데이-메이데이

(MaydayMaydayMayday)”라고 말한다고 한다.

이는 선박이나 우주 비행선 등에서 공통으로 사용되며, “국제적인 표준 구제요청 신호이다.

 

이는 1927년 미국에서 국제 조난신호로 채택하였으며,

반드시 메이데이라고 3번을 반복해야 하는 규칙이 있다.

 

근로자의 날(May Day)-4

 

근로의 날에 일어난 사건도 다양하게 있다.

19475월 전라남도 화순군 남면 사평리에서 노동자와 농민들이 메이데이[노동절] 기념식을 하던 중 경찰의 급습으로 다수가 체포되었던 사건도 있다.

미군 정기 화순군에서의 좌익 활동은 19461030일 화순 탄광 파업이 시작되며 극에 달하였다. 11월까지 이어진 파업 중에 전라남도 각지에서는 크고 작은 시위가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났다. 이른바 11월 봉기가 발생한 것이다.

11월 봉기 중에 시위대들은 왕왕 행정 관서와 경찰서를 공격하면서 경찰과 유혈 사태를 빚었다. 그러나 수많은 사상자를 낸 시위는 1946년 말에는 잦아들었다. 화순 탄광 파업도 11월에 이미 지도부의 체포로 와해된 상태였다.

1947년에 이르렀을 때 화순 지역을 비롯한 전라남도의 정치적 상황은 점차 미군정과 우익이 주도권을 쥐기 시작했다.

이에 좌익은 51일 메이데이를 맞아 194611월 봉기와 같은 규모로 대규모 집회를 조직하여 상황의 반전을 꾀했다.

화순 지역에서는 남면 사평리가 집회 장소로 선정됐다. 사평리는 일찍이 1914년 외남면이 창설됐을 때면 소재지가 되었던 마을이었고 1932년 내남면과 외남면이 통합돼 남면이 생겼을 때 다시 남면 소재지가 되었다. 1900년대 부터는 오일장이 열리는 장터였다.

사평리의 메이데이 기념식 집회는 앞서 1946년 화순 탄광 파업을 주도했던 조선 노동조합 평의회[약칭 전평] 계열의 인사들이 주도했다. 집회에 참석한 노동자들은 대부분 전평 계열의 광부들을 의미했다. 그밖에 인근 지역 농민들도 다수 참가했는데 이는 남로당이 남면·동면·한천면을 묶어 이른바 화순 특구로 부르며 세포 조직을 다져 놓은 결과였다. 그러나 메이데이를 기념하는 형식으로 행사가 시작되자마자 경찰 무장 부대가 집회장을 급습했다. 집회는 해산되었고 급습 과정에서 수십 명이 체포되고 부상자가 발생했다.

 

결과

 

메이데이 사건으로 화순 지역의 좌익 활동은 크게 쇠퇴하였다고 평가받는다. 그러나 사실은 1946년에서 1947년으로 해를 넘기며 좌익의 쇠퇴는 이미 뚜렷해진 상태였다. 메이데이 기념식을 사평리에서 개최하려고 시도했던 것 자체가 이런 쇠퇴를 암시한다.

 

화순군 남면 사평리는 화순 읍내에서 16, 화순 탄광에서 8떨어진 외곽이었다. 지역 정치의 중심지 또는 활동 거점을 피해 외진 시골 마을을 집회 장소로 택한 것이 이미 좌익의 주도권 상실을 보여 주는 것이었다. 메이데이 사건 후에 우익이 화순 읍내에서 2만 명을 동원해 반탁 집회를 개최한 것은 이러한 양상을 더욱 확연하게 보여 주었다.

이 사건의 의의는 이미 영향력을 크게 상실한 상태였음에도 대규모 집회를 조직할 수 있었다는 점에서 여전히 좌익이 광부 및 농민들에게 적지 않은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음이 확인된 사건이기도 했다. 그러나 좌익의 공개적인 활동은 더 이상 찾기 어려워지게 되었다. 좌익 활동가들은 이 사건 이후에 화순 지역의 산악으로 숨어 들어가 이후 산()사람, 즉 빨치산이 되는 경우도 있었다.

참조-화순군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은빛방송단 김종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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