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순에도 웃을 수 있는 이유
나는 오전 9시면 노인 일자리 주간보호센터에 도착한다. 동료 다섯 명과 함께 1, 2층 구역을 맡아 청소한다. 일을 하는 도중 프로그램에 참여하시는 어르신들과 인사를 나누고, 즐거워하시는 모습을 보며 나 또한 웃을 수 있다. 이렇게 웃을 수 있는 일자리가 있다는 것에 감사함을 느낀다. 팔순이 된 지금도 정해진 시간에 맞춰 출근하고, 몸을 움직이며 적은 월급을 받는 이 일터는 나의 소중한 직장이 되었다. 돌이켜보면 나는 평생을 쉬지 않고 살아왔다. 방 안에 가만히 앉아 세월을 보내기에는 내 성격이 허락하지 않았다.
나는 3남 2녀 중 셋째로 태어났다. 남존여비 사상이 강했던 시절이라 아들들은 고등교육을 받았지만, 언니와 나는 초등학교까지만 다녔다. 결혼 전까지는 부모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농사일을 도왔다. 이후 부모님의 주선으로 운수업을 하던 남편과 결혼했다. 남편은 10년간 하던 사업이 실패하자 부안 신시장에서 음식점을 시작했다. 생선찌개가 주메뉴였는데 정읍과 김제에서도 소문이 날 정도로 장사가 잘되었다. 하지만 기쁨은 오래가지 않았다. 빚에 대한 부담 때문이었을까, 남편은 식당을 시작한 지 5년 만에 세 아이를 남겨두고 세상을 떠났다. 그때부터 나는 가장이 되어야 했다. 두려움도 컸지만 멈출 수는 없었다. 식당 문을 닫지 않고 혼자서 이어갔다. 다행히 손님들은 계속 찾아주었고, 수입이 늘어나 남편의 빚을 모두 갚을 수 있었다. 몰랐던 보증 빚까지도 결국 다 상환했다.
그 후로는 자녀들의 학업에 더욱 관심을 쏟았다. 아이들은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성실히 성장해 주었다. 그중 한 아이는 대기업에 입사해 노력 끝에 임원 자리까지 올랐다. 그 모습을 바라보며 그동안 세월의 고단함이 모두 보람으로 바뀌는 것을 느꼈다.
나는 그렇게 40여 년을 식당에서 보냈다. 무릎 인공관절 수술로 한동안 일을 쉬기도 했지만, 몸이 회복되자 다시 일터로 돌아갔다. 그러나 결국 허리 통증이 심해지면서 칠순을 넘겨 식당 일을 내려놓게 되었다.
일을 그만두자 비로소 찾아온 시간은, 뜻밖에도 휴식이 아닌 공허함이었다. 그 허전함을 채우기 위해 시작한 그것이 텃밭 가꾸기였다. 작은 땅에 씨를 뿌리고, 물을 주고, 싹이 트는 모습을 바라보며 나는 다시 삶의 기쁨을 느끼기 시작했다. 또한 얼굴 마사지를 배워 복지관에서 자원봉사를 하며 다른 사람들을 돕는 기쁨도 알게 되었다. 그러던 중 대한노인회를 통해 노인 일자리 사업을 알게 되었고, 지금까지 3년째 참여하고 있다. 오전에는 3시간 일을 하고, 오후에는 경로당에 들르거나 텃밭에서 팥과 마늘, 양파를 가꾸며 하루를 보낸다. 쉬는 날에는 밭고랑을 만들며 새로운 작물을 심을 생각에 마음이 설렌다.
지금처럼 건강을 지키며,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하면서, 사람들과 웃음을 나누는 삶을 이어가는 것이다. 앞으로 10년, 아니 그 이상이라도 괜찮다. 내가 움직일 수 있는 한, 나는 계속 살아갈 것이다.
방송단 이명례 작가